성북동 글방 희영수

떠내려오라 귀인이여, 이쪽으로만 _250410 본문

2025 긴개

떠내려오라 귀인이여, 이쪽으로만 _250410

긴개 2025. 5. 1. 21:15

 

2025.4.10. 목요일
 
세상은 넓다. 놀랍게도 좋은 사람도 많다. 예전엔 좋은 사람은 이미 다 천국에 간 줄 알았다. 하느님이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을 너무 빨리 데려간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기가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구질구질하던. 종점 대기하던 버스에 앉아있으려니 기사가 “우리 둘만 남았네, 오붓하게” 같은 소릴 지껄였고(그뒤로 나는 버스기사에게 인사하는 걸 그만두었다), 해방촌 건물주는 골목에서 똥을 주워와 우리집 고양이 간수 잘 하라며 현관문을 두들겼다(우리 고양이는 평생 실내에서 살았다). 동네 할머니들은 인사를 씹거나 자기네끼리 누군데 아는 체냐며 수군거렸다. 오빠라고 부르라는 70대 사장, 등 뒤에서 내 모니터를 내려다보며 비웃던 대표들, 사람들 앞에서 면박 줄 기회를 엿보던 직장 상사, 얼굴에 담배 연기 좀 내뿜지 말라고 해도 들어 쳐먹질 않던 친구, 부모님 아파트 매매가를 검색하던 틴더남, 단 한 번 스치듯 인사 나누고 몇 년 뒤 트위터에 내 욕을 쓰던 여자 등등. 돌이켜보면 이런 새끼들 옆에서 어떻게 제정신이었을까 의아할 정도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디 운이라도 트였나. 그런 사람들 못본지 꽤 되었다. 최고의 마을버스 기사님과 친해졌고, 건물주는 집 수리를 기꺼이 도우며, 동네 할머니들이랑은 만나면 반가워 한참을 떠들고, 직장동료들에게 배울 점이 너무 많고, 항상 먼저 배려하는 친구들 덕분에 웃을 일이 많고, 우연히 만난 사람들도 대체로 친절하다. 내가 바뀐 건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게 멍청하다. 공감 능력은 여전히 떨어지고, 무심한 분야에선 외계인처럼 아는 게 없다. 그저 이전의 인간들과 연을 끊은 게 전부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진다. 문제는 너네였네. 내가 아니었네. 자주 만나는 사람만 달라져도 이렇게 일상이 행복해진다. (참고로 나는 생전 안 읽던 인간관계-자기계발서를 탐독한 뒤 상대에게 웃거나 칭찬하기, 진솔한 인사 건네기 등의 적극적 노력을 충분히, 더는 못할 정도로 했으니 단순한 손절로 오해하지는 않길 바라며...)
개자식들을 겪어서 좋은 점은, 귀인을 알아보는 눈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아니 세상에 이렇게 긍정적이고 배려 깊은 일상 화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실재한다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이렇게 묵묵히 청소를 도맡는 사람이 있다고? 정당한 화라도 절대 쉽게 표현하지 않으려고 필사의 노력으로 참는 사람이 AI가 아니라고? 상대가 필요로 하는 위로를 적절히, 거기에 위트까지 넣어 표현하는 사람이 내게 호의를 보인다고? 그럴 때마다 기절할 것 같다. 어떻게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나타났을까. 절대 실망시키지 말아야지. 혹여나 나로 인해 인간에 대한 염증을 느끼거나 다정의 교환가치를 따지는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받들어 모셔야지. 저 사람과 불화가 생긴다면 그건 전부 내 탓일 거다. 그러니 항상 긴장하자. 좋은 사람이 계속 좋은 사람일 수 있게, 내 역할을 다하자.
놀랍게도 요즘 일상에 귀인이 많다. 정말 내가 잘한 건 하나도 없다. 그냥 우리는 자주 마주치다보니 인사를 나누고, 그러다 점차 구체적인 호의를 주고 받게 된 것뿐이다. 그런 사소한 계기로 이런 귀인들과 교류할 수 있다니 인생의 운을 전부 지금 몰아쓰는 게 아닐까 싶어 불안해진다. 그러나 쌍놈들을 만난 것도 내 탓이 아닌 만큼, 귀인을 뵙게 되는 것도 내 덕이 아니니 그저 흘러가는 사람들을 잠자코 바라볼 수 밖에. 흘러오는 게 귀인일 때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할 수 밖에. 그야말로 호시절을 누리고 있다.